[2019년] 11월의 호국인물 이광악 장군
11월의 호국인물 이광악 장군
전쟁기념관은 임진왜란 당시 왜적을 격퇴하는데 큰 공을 세운 이광악 장군(1557~1608)을 2019년 ‘11월의 호국인물’로 선정, 발표했다.
1557년(명종 12) 충주 유동리에서 태어난 이광악 장군은 어려서부터 장대한 기골과 목소리가 크고 맑아서 대인의 기질이 있었다. 또한 학문과 수신에 힘쓰기 보다는 말을 타고 전장을 누비는 것을 즐겨, 무과에 급제하여 무관으로 출사하는데 그뜻을 두었다. 1584년(선조 17) 무과 별시에서 을과 16위로 급제하여 선전관에 제수되었으며, 이후 연일(延日)현감ㆍ이성(利城)현감ㆍ경주(慶州)판관을 거쳐 1591년(선조 24) 곤양(昆陽)군수에 임명되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 당시, 이광악 장군은 곤양군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가 참전한 최초의 전투는 같은해 5월 무렵 함안전투였다. 이광악 장군은 함안에서 왜군을 격퇴한 뒤 고성 지역에 왜군이 침범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곧바로 회군하여 다시 고성을 공격하여 적을 압박하였다. 7월 말 다시 진주성 부근에 있었던 전투에 참가하여, 진주성 수비군의 좌익을 맡아 다른 장수들과 함께 사천, 진해, 고성 일대의 여러 고을들을 회복하였다.
한편 제해권을 상실한 일본군은 남해안 지방의 거점 확보가 어려워지자 불리해진 전세를 회복할 목적으로 대대적으로 진주성을 공격하였다. 이광악 장군은 초유사 김성일의 명령으로 병력을 이끌고 진주성으로 들어가 진주목사 김시민과 함께 일본군에 맞섰다. 10월 초 일본군의 선봉이 진주성의 동쪽을 공격함으로써 진주성전투가 시작되었고, 격렬한 전투 속에 진주목사 김시민이 부상을 입어 지휘를 할 수 없게 되자 김시민을 대신하여 장수들을 이끌고 전투를 진두지휘하여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
또한 정유재란 때에는 남원전투에서 순국한 이복남(李福男)을 대신하여 전라병사에 임명된 이광악 장군은 순천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대와 전투를 벌였다. 그 결과 순천․광양전투에서 승리하였으며, 이어 예교성전투에서는 조․명연합군의 선봉군으로 활약하였다.
임진왜란의 초반에서부터 마지막 전투에 이르기까지 이광악 장군은 임진왜란 극복의 주요 지휘관으로 활약하였으며, 그 전공을 인정받아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에 책훈되었다. 이후 수원(水原)부사ㆍ경기도방어사ㆍ영흥(永興)부사를 거쳐 1606년(선조 39)에는 함경남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 1608년 12월 29일 52세 나이로 별세하였으며, 1711년(숙종 37) 충장(忠壯)의 시호를 받았다.
11월 7일(목 14:00) 전쟁기념관 호국추모실에서는 유가족 및 육군 주요 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고인을 추모하는 현양행사가 거행될 예정이다.
"본 저작물은 전쟁기념관에서 '2019년' 작성하여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보도자료를 이용하였으며, 해당 저작물은 정책브리핑 사이트 www.korea.kr 에서 무료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