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의 독립운동가 / 이길용, 송진우, 여운형 선생
마라톤 우승의 감격, 일장기 말소로 표현하다.
국가보훈처(처장 황기철)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이길용(1899~미상), 송진우(1890~1945), 여운형(1885~1947) 선생을 2021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이길용, 송진우, 여운형 선생은 민족정신을 되살리고 자부심을 지키기 위해 시행한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사건의 실행자와 언론사 책임자로 활약하신 분들이다.
1936년 8월 9일 손기정이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함께 출전한 남승룡이 3위에 입상하였다. 손기정과 남승룡의 마라톤 제패로 조선 전역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일본어 발행 신문들은 일본인으로서 손 기테이(손기정의 일본어 발음)를 칭송하였지만, 동아일보 등은 세계 유수의 민족과 겨루어 당당히 우승한 ‘조선인’ 손기정을 강조하였다.
엄청난 열기에 휩싸인 우승소식 이었지만 정작 한글 신문에 손기정의 수상 사진이 처음으로 실린건 8월 13일이었다. 조선중앙일보 1936년 8월 13일자 조간 4면 우측 하단에 처음 실렸다. 우승한 손기정의 얼굴도 자세히 알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은데 가슴에 아무런 표식도 없었다.
당시 체육부 기자인 유해붕은 붓으로 일장기를 지운 흔적이 있는 사진을 사진부에 전달했고 사진부 기자는 모른 척 넘어갔다. 총독부의 검열 담당자도 모르고 넘어갔다. 같은 날 조간에 '동아일보'도 이 사진을 실었지만 흐릿한 원본 사진으로 인해 일장기를 고의로 지웠다고 판단하기는 모호했다. 첫 사진 게재 때는 총독부 검열당국은 신문사들의 의도를 몰랐다.
이후 동아일보는 8월 26~28일까지 올림픽 활동사진 상영회 개최 광고를 위해 시상식에 선 우승자 손기정과 3위 입상한 남승룡 사진을 8월 25일 신문에 게재했고 여기서 손기정 가슴의 일장기를 이길용이 주도하여 말소하였다.
당시 동아일보 체육부장이었던 이길용은 오랫동안 민족차별을 하다가 손기정 선수가 우승을 하니,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우승으로 대서특필하는 모양을 도저히 참고 보기 어려웠다고 회고했다.
이렇게 민족차별에 대해 강한 분노를 느끼고 있던 이길용이 일장기 말소를 주도하였다. 경찰조사에 따르면 약간 진술이 엇갈리긴 하나 이길용은 화가이자 사진부 기자였던 이상범에게 사진을 넘기면서 가슴의 일장기를 흐리게 수정해 달라고 요청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고, 그 지시를 받은 이상범은 이길용이 일장기를 지워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회고하였다.
일장기가 말소된 사진을 본 조선총독부의 검열 당국자는 바로 대응에 나섰다. 경찰은 약 이틀 동안 사건의 전모를 밝히려고 연행자들에게 모진 고문을 자행하였다. 경찰이 연행자들에게 고문함으로써 얻으려 한 것은 송진우 등 동아일보 고위 간부들의 지시 여부였다. 하지만 실제 임원들의 지시가 없었기 때문에 사진이 실린 사회면의 부장인 현진건의 책임을 묻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그리고 조사 결과를 발표한 직후인 8월 27일 오후 5시에 조선총독부는 송진우 사장을 호출하여 무기정간을 통보하였다.
경찰은 동아일보를 수사하면서 다른 신문도 조사하였다. 시상식에 올라선 손기정과 남승룡을 실은 사진은 '동아일보' 외에 '조선중앙일보' 뿐이었다. '동아일보' 조사와 정간 처분이 끝난 후인 9월 1일 '조선중앙일보' 기자 유해붕이 경찰에 소환되었다. 경찰의 취조가 진행되는 동안 '조선중앙일보'도 자체 조사를 벌여서 8월 13일자 사진의 일장기를 사진을 지운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에 '조선중앙일보'는 9월 5일자 석간에서 당국의 처분이 내리기 전에 자진 휴간을 선언하였다.
일장기 말소사건은 총독부의 한글 신문 통제에 큰 전환점이 됐다. 총독부는 문화정치의 산물인 한글 신문에 대해 강경책으로만 대응할 수는 없었던 시기에 신문사를 강하게 압박할 수 있었다.
이 사건으로 총독부는 송진우를 비롯한 임원진을 강제 면직시키고 관련 업무 종사를 못 하도록 명령했다. 이후 동아일보는 복간을 위해 총독부와 10개월의 장기간의 협상을 했으나 총독부의 ‘개혁’ 요구를 받아들이고 1937년 6월 2일자로 복간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한편 자진 휴간에 들어갔던 조선중앙일보사는 한 달 정도 쉬고 복간할 계획이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우선 총독부가 속간을 허락하지 않아서 ‘반강제적’인 휴간이 계속되었다. 거기에 재정상황에 따른 내분으로 사장인 여운형의 사퇴문제가 발생하였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조선중앙일보'의 진로에 대한 충돌이었다. 한쪽은 새로운 자본을 투입하여 신문기업으로서 위치를 탄탄히 하기 위해 총독부의 개선 요구를 현실적으로 인정하자는 입장이었다. 반면에 여운형은 민중을 계몽하고 민족의 의사를 최소한이라도 표현할 수 없다면 “'조선중앙일보'의 사명이 다했다”고 생각했다. 여운형은 자신의 사퇴문제로 복잡한 상황 속에서도 총독부의 타협책을 거부하고 속간에 동의하지 않음으로써 '조선중앙일보'의 역사성을 지켰다. '조선중앙일보'는 1937년 11월 5일자로 신문지법에 규정된 발행 허가 효력이 상실됨으로써 폐간되었다.
민족운동이 와해되고 서서히 꺼져가던 시점에 일장기 말소사건은 민족에 새로운 의지와 자부심을 심어주었다. 일본인 손기테이가 아닌 조선인 손기정으로 조선민족의 자부심을 알리고자 한 이길용을 비롯한 기자들과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한 임원들인 송진우, 여운형의 활약은 암울해진 1930년대 식민통치에 조선인들에게 자부심이 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들의 공훈을 기려 이길용 선생에게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송진우 선생에게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그리고 여운형 선생에게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과 2008년에는 광복 이후 민족통일을 위한 헌신과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공로로 행정안전부 추천으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본 저작물은 국가보훈처에서 '2021년' 작성하여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보도자료를 이용하였으며, 해당 저작물은 정책브리핑 사이트 www.korea.kr 에서 무료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